【편집자 주】
학주(鶴洲) 김홍욱(金弘郁·1602~1654)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강직한 언관으로, 백성의 고통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고 나라의 명분과 공의를 지키는 데 일생을 바쳤다.
그는 흉년과 전염병으로 신음하는 백성의 삶을 가까이에서 살폈으며, 병자호란 이후에는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굽히지 않았다.
특히 억울하게 죽은 소현세자빈 강씨의 신원을 청원하다 혹독한 고문 끝에 순절함으로써 선비의 직언이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충남대학교 정만호의 연구 「학주 김홍욱의 의식세계 탐구」를 바탕으로, 학주의 삶을 관통한 애민정신과 존명배청의 의리, 직무에 충실한 직언정신을 되새겨본다.
난세에 태어나 공의의 길을 걷다학주 김홍욱은 1602년, 임진왜란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선조 말기에 태어났다. 자는 문숙(文叔), 호는 학주(鶴洲)다.
1623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635년 문과에 급제한 뒤 승문원·사헌부·홍문관 등 중앙의 주요 관서를 거쳤으며, 충청도관찰사와 황해도관찰사 등 외직에서도 백성의 삶을 직접 살폈다.
그가 관직에 있던 시대는 광해군 말기의 혼란과 인조반정,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잇따른 격변기였다. 국가는 전란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백성은 흉년과 전염병, 과중한 세금과 부역에 시달렸다. 명과 청의 세력 교체 속에서 조선의 외교적 명분과 현실적 생존이 충돌하던 때이기도 했다.
그러나 학주는 시대의 혼란을 출세의 기회로 삼지 않았다. 그는 관리의 존재 이유를 백성의 삶을 보살피고, 임금이 바른 길로 나아가도록 직언하는 데서 찾았다.
그에게 벼슬은 권세가 아니라 책임이었으며, 언관의 말은 개인의 영달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한 공적 의무였다.백성의 울음에서 나라의 위기를 읽다학주의 시문과 행적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정신은 애국애민(愛國愛民)이다. 그가 지방관으로 재임하던 시기에는 흉년과 전염병이 거듭됐다.
굶주린 백성들은 고향을 떠나 유랑했고, 병든 이들은 제대로 치료조차 받지 못한 채 죽어갔다.학주는 이를 단순한 자연재해로 여기지 않았다. 백성이 굶고 병드는 현실은 곧 정치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보았다.
그는 백성들의 피폐한 생활을 직접 살피고 구휼 방안을 마련하는 한편, 조정에 그 참상을 상세히 보고하며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촉구했다.그의 시에는 흉년을 맞아 텅 빈 들녘과 굶주린 백성, 인적이 끊긴 마을의 참상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관찰자의 냉정한 기록이 아니라 백성의 고통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인 목민관의 비통한 심정이었다.그가 추구한 정치는 거창한 구호보다 한 사람의 굶주림을 덜어주는 데서 시작됐다. 백성이 편안해야 나라가 안정되고, 민심을 잃은 정치는 오래갈 수 없다는 것이 학주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이는 백성을 국가의 근본으로 여긴 민본정치의 실천이자, 관리가 마땅히 지녀야 할 목민의 도리였다.명분을 잃은 나라는 바로 설 수 없다학주의 또 다른 정신적 축은 존명배청(尊明排淸)의식이다. 병자호란의 치욕을 겪은 조선 사회에서 청나라에 대한 태도는 단순한 외교 문제를 넘어 국가의 명분과 정체성에 관한 문제였다.학주는 청의 강압에 굴복한 현실을 깊이 통탄했다. 현실적으로 청과의 관계를 외면할 수 없었지만, 힘에 눌려 의리와 명분마저 버려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일은 과거 왕조를 향한 맹목적인 충성이라기보다, 강자의 폭력 앞에서도 인간과 국가가 지켜야 할 도의를 포기하지 않는 문제였다.그는 병자호란 이후의 굴욕을 잊지 않았으며, 나라가 힘을 기르고 국치를 씻어야 한다는 의지를 시문과 상소에 담았다.
국력이 약하다고 해서 정신까지 굴복해서는 안 되며, 현실적 어려움 속에서도 국가의 품격과 자존은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학주의 이러한 의식은 효종의 북벌 구상과도 맞닿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북벌을 단순한 군사적 구호로만 보지 않았다.
내부의 억울함을 풀고 민심을 수습하며 조정을 바로 세우는 일이 선행돼야 국가적 대업도 추진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권세보다 공론을 앞세운 직언학주에게 직언은 선택이 아니라 관직에 따르는 본분이었다. 그는 언관으로서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고 권신의 전횡을 비판했으며, 조정의 기강이 무너질 때마다 거리낌 없이 상소를 올렸다.그의 비판은 특정한 개인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사사로운 이해와 붕당의 논리가 공론을 흐리고, 권세 있는 자들이 국가의 원칙을 흔드는 일을 경계한 것이다.
그는 관리가 자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해 할 말을 삼킨다면 조정의 잘못은 더욱 커지고, 그 피해는 결국 백성에게 돌아간다고 보았다.학주는 옳다고 믿는 일 앞에서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았다. 상대가 권력자이든 임금이든 자신의 판단을 분명히 밝혔다.
말 한마디가 관직을 잃게 하고 목숨까지 위태롭게 할 수 있는 시대였지만, 침묵으로 자리를 지키는 것은 선비의 도리가 아니라고 여겼다.그의 강직함은 고집이나 독선과 달랐다. 학주의 직언은 나라를 걱정하는 충정과 백성을 향한 책임에서 비롯됐다. 임금에게 올리는 비판조차 군주를 바른 정치로 이끌기 위한 충성의 한 방식이었다.“강빈의 원혼을 풀어야 한다”학주의 삶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은 소현세자빈 강씨의 신원을 청한 일이다.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귀국한 뒤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세자빈 강씨는 역모 혐의를 받아 사사됐다.
그의 친정 일가도 큰 화를 입었다. 그러나 사건의 처리 과정에는 의문이 많았고, 조정 안팎에서는 강빈이 억울하게 희생됐다는 여론이 끊이지 않았다.
효종 5년인 1654년, 학주는 황해도관찰사로 재임하며 올린 상소에서 강빈의 억울함을 풀어줄 것을 청했다.
효종의 정통성과 왕실의 민감한 문제를 건드릴 수 있는 위험한 상소였지만, 학주는 국가가 대의를 세우려면 먼저 내부의 원통함을 풀어야 한다고 판단했다.북벌이라는 큰 뜻을 이루기 위해서도 억울하게 죽은 이의 원혼을 위로하고, 흐트러진 민심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는 논리였다. 잘못된 일을 바로잡지 않은 채 대업을 말하는 것은 명분에도 맞지 않고 실효성도 없다고 본 것이다.상소를 접한 효종은 격노했다. 학주는 국문을 받았고, 혹독한 고문 속에서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끝내 그는 장형을 견디지 못하고 5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목숨을 살리기 위해 뜻을 거두거나 책임을 피할 수도 있었지만, 학주는 마지막까지 공론과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다.절의는 말이 아니라 삶으로 증명된다학주 김홍욱의 삶은 애민·의리·직언이라는 세 가지 정신으로 집약된다. 그는 백성의 굶주림을 외면하지 않은 목민관이었고, 국난의 치욕 속에서도 나라의 명분을 지키고자 한 충신이었다.
또한 권세와 형벌 앞에서도 옳은 말을 거두지 않은 참된 언관이었다. 그의 죽음은 한 충신의 비극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공직자가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며, 선비가 지켜야 할 마지막 자리가 어디인지를 보여준 역사적 증언이다.학주의 정신적 뿌리에는 불의한 권력에 굴복하지 않고 대의를 위해 생명을 바친 상촌공 김자수의 절의가 흐르고 있다. 시대와 처지는 달랐지만 두 인물은 모두 목숨보다 의리를 중하게 여겼으며, 말과 행동을 하나로 일치시켰다.절의는 평온한 때의 아름다운 수사가 아니다. 손해와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마땅히 지켜야 할 가치를 포기하지 않는 결단이다.
백성을 사랑한다면서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정의를 말하면서 권력 앞에 침묵한다면 그것은 참된 선비정신이라 할 수 없다.오늘의 공직사회와 공동체 역시 학주의 삶을 깊이 돌아볼 필요가 있다. 공적 책임보다 사사로운 이해를 앞세우고, 갈등을 피한다는 명분 아래 마땅히 해야 할 말을 삼킨다면 공동체의 신뢰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학주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화려한 벼슬이나 문장이 아니다. 백성 앞에서는 따뜻했고, 불의 앞에서는 단호했으며,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말을 거두지 않았던 삶 그 자체다.
시대가 달라져도 공직자의 양심과 지도자의 책임, 공동체가 지켜야 할 공의는 변하지 않는다.상촌공의 절의를 이어받아 백성을 품고 나라의 의리를 지킨 학주 김홍욱. 그의 삶은 오늘 우리에게 묻는다.“그대는 옳다고 믿는 일을 위해 무엇을 감당할 수 있는가.”이 물음에 정직하게 답하는 것, 그것이 학주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고 상촌의 선비정신을 후대에 온전히 전하는 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