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상촌신보』는 창간 1주년을 맞아 상촌공(桑村公) 김자수 선생의 후손이자 조선 후기 학문과 예술의 높은 경지를 이룬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선생의 삶과 정신을 조명한다.권세에 굴하지 않고 의리를 지킨 상촌공의 강직한 기개는 가문의 정신적 유산으로 면면히 이어져, 수백 년 뒤 추사의 학문과 예술 속에서 다시 꽃피었다.
특히 제주 유배라는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지조와 신념을 잃지 않았던 추사의 선비정신은 국보 《세한도(歲寒圖)》에 오롯이 응축돼 있다.본보는 이번 기획을 통해 《세한도》에 깃든 예술적 가치뿐만 아니라, 고난 앞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던 추사의 선비적 투혼과 언행일치의 삶을 되새기고자 한다.
아울러 상촌공으로부터 추사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넘어 계승된 절의와 강직한 가풍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와 가르침을 전하는지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1. 절대 꺾이지 않는 뿌리, 상촌공의 유산명문가의 진정한 가치는 벼슬의 높고 낮음이나 권세의 크기에 있지 않다. 역사의 격랑과 위기의 순간에도 스스로의 이름을 부끄럽게 하지 않는 삶을 살았는가, 곧 정명(正名)의 윤리를 어떻게 실천했는가에 따라 그 가문의 품격이 결정된다.추사라는 거목을 길러낸 정신적 토양의 뿌리에는 고려 말 조선 초의 격변기 속에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대의를 목숨으로 지켜낸 상촌공 김자수 선생의 결연한 선택이 자리하고 있다.새 왕조의 권력 앞에서도 상촌공은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 태종이 형조판서라는 높은 벼슬을 내리며 출사를 권유했으나, 선생은 이를 단호히 물리치고 자결로써 선비의 마지막 보루인 염치(廉恥)를 지켰다. 권력과 타협해 삶을 이어가는 길보다 죽음으로 절의를 완성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상촌공이 남긴 이러한 정신적 유산은 후손들에게 단순한 선조의 미담이나 가문의 자랑에 머물지 않았다. 그것은 삶의 갈림길에서 불의와 타협하려 할 때마다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엄정한 기준이었으며, 어떠한 권력과 시련 앞에서도 기개를 잃지 않게 하는 자긍심의 근원이 되었다.2. 피로 써 내려간 직언(直言)상촌공의 절의는 조선 중후기 충청도 서산 한다리를 중심으로 세거하며 이른바 ‘한다리 김문’으로 불린 후손들에게 면면히 이어졌다. 수많은 정승과 판서를 배출한 명문가였지만,
이 가문의 진정한 명성은 높은 관직이나 권세보다 불의에 굴하지 않는 강직한 기풍에서 비롯되었다. 그 정신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인물이 바로 추사의 8대조인 학주(鶴洲) 김홍욱(金弘郁) 선생이다.효종 때 소현세자의 죽음과 강빈의 억울한 사사(賜死)를 둘러싸고 조정은 무거운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누구도 국왕의 뜻을 거스르는 말을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했다.
그러나 당시 충청도관찰사였던 학주공은 선비의 양심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는 강빈의 억울함을 밝히고 소현세자의 남은 아들들을 풀어줄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효종의 노여움을 산 학주공은 친국을 받으며 혹독한 형벌을 당했다. 거듭되는 국문 속에서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으며, 언관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직언을 했다는 신념을 끝까지 지켰다. 결국 그는 모진 장형을 이기지 못하고 순절하였다.학주공의 죽음은 단순한 정치적 좌절이 아니었다. 상촌공이 자신의 몸으로 지켜낸 절의가 약 200년의 세월을 넘어 역사 속에서 다시 실천된 사건이었다.
이후 한다리 김문은 권력에 영합하기보다 바른말을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선비 가문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학주공의 충절은 후손들이 삶의 방향을 바로 세우는 정신적 기준으로 깊이 자리 잡았다.3. 세도정치의 심연에서 되살아난 가문의 정신19세기 세도정치의 한복판에서 태어난 추사 김정희는 왕실과 인연을 맺은 명문의 후예이자, 젊은 시절부터 청나라 연경을 오가며 국제적인 학문 세계를 구축한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금석학과 고증학, 서예와 회화에 이르기까지 독보적인 경지를 개척하며 조선 지성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러나 그의 삶 곳곳에는 상촌공의 절의와 학주공의 강직함을 떠올리게 하는 면모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세상을 향한 날카로운 비판의식과 부정에 타협하지 않는 자세는 그의 학문과 예술을 높은 경지로 이끈 원동력이었지만,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는 혹독한 시련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쉰다섯 살이 되던 해, 추사는 윤상도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 대정현으로 유배되었으며 위리안치(圍籬安置)라는 중형을 받았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에게 내려진 이 형벌은 관직과 명예를 빼앗는 데 그치지 않고, 사회적 존재로서의 삶마저 지워버리려는 가혹한 처사였다.풍토병이 만연한 낯선 섬에서 오랜 고립과 궁핍을 견뎌야 했고, 평생을 함께한 아내의 부고마저 뒤늦게 접해야 했다. 인간으로서 감내하기 어려운 시련이었지만, 추사는 절망 속에서도 학문과 예술을 놓지 않았다.그는 시련의 벼루에 절망을 갈아 넣는 대신 자신의 정신을 더욱 단단하게 벼려 나갔다. 상촌공과 학주공으로 이어진 가문의 절의는 추사의 삶에서 치열한 자기 수양과 창작의 정신으로 되살아났다. 세상이 자신을 외면할수록 그는 더욱 깊이 학문에 침잠했고, 고통이 커질수록 붓끝에는 더욱 엄정한 기운을 담아냈다.4. 엄정한 필치로 새긴 절의의 정신제주 유배 5년째인 1844년(헌종 10)에 그려진 《세한도》는 어려운 처지에서도 변함없이 의리를 지킨 제자 이상적(李尙迪)에게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그린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사제 간의 신의를 넘어, 상촌공으로부터 이어진 절의와 선비정신을 상징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화면을 지배하는 것은 화려한 색채도, 장식적인 기교도 아니다.
메마르면서도 절제된 필선과 고요하고 엄정한 구성이다. 추사는 갈필(渴筆)을 극대화해 소박한 집 한 채와 몇 그루의 소나무와 잣나무만을 화면에 남겼다.물기를 걷어낸 붓놀림은 외형의 화려함을 버린 대신 대상의 내면에 깃든 골기(骨氣)를 드러낸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푸름을 잃지 않는 송백(松柏)은 온갖 시련과 냉대 속에서도 절의를 지키는 선비의 모습과 겹쳐진다.
이는 고려 왕조에 대한 의리를 목숨으로 지킨 상촌공과 바른말을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학주공의 충절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화면 상단에 적힌 ‘歲寒圖’ 세 글자 또한 예사롭지 않다. 쇠끝으로 바위를 새긴 듯한 힘 있는 필획에는 세상의 권세와 냉대에 굴하지 않는 정신이 응축되어 있다.
장식적인 아름다움을 덜어낸 엄정한 필선은 유배라는 극한의 현실 속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선비의 품격만큼은 결코 잃지 않겠다는 추사의 의지를 보여주는 듯하다.이러한 맥락에서 《세한도》는 변함없는 제자의 의리를 기리는 작품인 동시에, 세속의 냉대와 시련 속에서도 끝내 시들지 않는 절의와 인간 존엄을 형상화한 불후의 명작으로 읽을 수 있다. 선비의 정신이 학문을 넘어 예술로 승화되고, 한 가문의 오랜 가풍이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 가치로 응결된 것이다.5. 세한(歲寒)의 시대를 건너는 상촌공파의 시대정신맹자는 “하늘이 장차 어떤 사람에게 큰 임무를 맡기려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괴롭게 하고, 그 몸을 지치게 하며, 하는 일마다 뜻대로 되지 않게 하여 그 인내를 기른다”고 하였다.
상촌공에서 학주공을 거쳐 추사에 이르는 수백 년의 역사는 고난을 신념으로 이겨낸 한 가문의 장대한 정신사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들의 삶을 단지 강직함과 절개의 역사로만 이해해서는 그 깊은 뜻을 온전히 헤아릴 수 없다.
상촌공의 절의와 학주공의 결기, 추사의 엄정하고 치열한 학문·예술 세계는 사람을 향한 냉혹한 엄격함이 아니라,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와 품격에 대한 깊은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이들이 권력 앞에서 뜻을 굽히지 않았던 것은 세상을 등졌기 때문이 아니다. 세상이 끝내 정의와 올바름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누구보다 엄격했던 것 역시 타인을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과 공동체의 바른 질서를 지키려는 선비의 책임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상촌공의 절의와 학주공의 충절, 추사의 엄정한 필법과 치열한 자기 수양 속에는 결국 인간 세상에 대한 신뢰와 사람을 향한 깊은 사랑이 온축(蘊蓄)되어 있다.
겉으로는 차갑고 단호해 보이지만, 그 정신의 바탕에는 후세가 더욱 바르고 정의로운 세상에서 살아가기를 바라는 따뜻한 마음과 공동체를 향한 깊은 연민이 흐르고 있었다.
혹독한 겨울을 견뎌 더욱 푸르러지는 송백처럼, 그들의 엄정함은 사람을 세우고 세상을 바로잡기 위한 강인한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정신적 빈곤과 가치의 혼란을 경험하고 있다.
눈앞의 이익에 따라 원칙을 바꾸고 불의 앞에서 침묵하는 일이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시대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사회 역시 또 다른 의미의 세한(歲寒)을 지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이러한 때에 《상촌신보》가 창간 1주년을 맞아 선조들의 삶과 정신을 다시 돌아보는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다. 추사가 차디찬 제주의 바람 속에서 남긴 《세한도》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당신은 어떠한 원칙과 품격으로 자신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가.”상촌공파가 오랜 세월 명문의 존엄을 지켜올 수 있었던 까닭은 단지 권력의 중심에서 높은 벼슬을 지낸 인물을 많이 배출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떠한 권력 앞에서도 마땅히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절의의 기백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백의 뿌리에는 사람과 세상을 향한 굳건한 믿음이 자리하고 있었다. 절의는 사람을 위한 것이었고, 충절은 공동체를 위한 것이었으며, 학문과 예술 또한 인간의 품격과 존엄을 지키기 위한 길이었다.오늘 우리가 진정으로 이어받아야 할 유산은 족보에 기록된 화려한 관직이나 권세가 아니다. 시련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던 올곧은 정신이다.
그것은 단순한 강직함을 넘어 사람을 믿고 세상을 바로 세우려는 책임감이며, 자신의 양심을 끝까지 지키면서도 타인을 향한 연민과 사랑을 잃지 않는 선비의 품격이다.거센 눈보라를 견뎌낸 소나무의 향기가 더욱 깊어지듯, 상촌공의 절의와 학주공의 충절, 그리고 추사의 묵향은 시대를 넘어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도 이어져야 한다.
삶에 피할 수 없는 추위가 찾아오고 세상의 기준이 흔들릴 때마다, 벼루가 닳도록 자신을 갈고닦았던 선조들의 엄정한 정신을 기억해야 한다. 그 엄정함은 사람을 향한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한 자기 절제였으며, 정의를 향한 희망을 끝내 포기하지 않기 위한 신념이었다.
상촌공파의 얼을 이어받은 우리 모두가 그 정신을 가슴 깊이 새겨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중심을 세우고, 이 시대의 추위를 이겨내는 또 하나의 푸른 송백으로 우뚝 서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