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한 시대의 서막은 언제나 구시대의 종언(終焉) 위에서 열린다. 1392년, 개경의 하늘에 이씨 왕조의 깃발이 오르던 순간에도 역사는 어김없이 승자의 이름으로 채워졌다.그러나 그 찬란한 건국의 이면에는,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거두고 역사의 흐름에 침묵으로 맞선 이들이 있었다.권력 앞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고, 시대와 타협하지 않은 채 스스로의 길을 선택한 사람들. 그들이 바로 두문동 72현이다.두문동 72인은 고려 멸망 직후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를 지키며 개성 광덕산 기슭 두문동에 은거한 유신(遺臣)들을 일컫는다. 이들은 태조 이성계의 거듭된 회유에도 끝내 응하지 않고 ‘두문불출(杜門不出)’로 일관하며 시대에 대한 침묵의 저항을 이어갔다.시공을 넘어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결국 역사다. 매년 4월이면 청명과 한식이 겹쳐 다가온다. 이때 주목해야 할 대목은 한식의 유래로 전해지는 개추자(介推子), 곧 개자추(介子推)의 고사다.춘추오패 진문공과 충신 개자추춘추시대 진나라의 충신 개자추(介子推)는 제나라 환공, 초나라 장왕, 월왕 구천, 오왕 합려·부차 등과 더불어 춘추오패로 꼽히는 진문공을 도운 인물이다. 그는 공을 내세우지 않았으며 보상 또한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군이 자신을 잊은 듯한 상황 속에서 깊은 서운함을 안고 끝내 산중으로 은거의 길을 택했다.뒤늦게 이를 알게 된 진문공은 개자추를 불러내기 위해 산에 불을 놓았으나, 그는 끝내 하산하지 않고 나무를 끌어안은 채 생을 마감했다.진문공은 그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며, 그를 기리기 위해 매년 그가 세상을 떠난 날에는 불을 피우지 못하도록 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불을 사용하지 않고 미리 준비한 찬 음식, 곧 한식(寒食)을 먹게 되었고, 이러한 풍습이 오늘날 ‘한식’으로 전해지게 되었다.우리나라에서는 이 시기가 농번기와 맞물려 성묘를 하고 개사초(改莎草, 무덤의 떼를 새로 입히는 일)를 하는 풍습으로 자리 잡았다.조선 건국 세력이 두문동에 불을 질러 유신들을 끌어내려 했다는 전언 속에서도, 고려의 선비들은 개자추와 같이 끝내 물러서지 않았다. 일부는 불길 속에서도 절개를 굽히지 않은 채 생을 마감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와 같은 결단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무력으로는 결코 꺾을 수 없는 정신의 승리이자 스스로의 존엄을 지켜낸 선언이었다.두문동 72현과 충신 경주 김씨 선조들고려 멸망 이후 끝까지 절개를 지킨 두문동 72현 가운데에는 경주 김씨(慶州 金氏) 선조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여말 대사성·대사헌을 지낸 상촌공파 파조 김자수(金自粹) 선조는 그 대표적 인물이다. 상촌(桑村)은 조선 개국 이후에도 태종 이방원이 그의 재능을 아껴 형조판서 직첩을 내리고 여러 차례 조정에 불렸으나, 끝내 이를 사양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충절을 지켰다.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 “나를 고려의 선비로 묻어달라”는 뜻과 함께 “무덤에 비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후손들 또한 이러한 유계(遺戒)를 받들어 비석을 세우지 않거나 눕혀 두는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수은공파 파조 김충한(金沖漢) 선조 역시 고려 말 예의판서를 지냈으나, 망국 이후 만수산 두문동에 들어가 끝내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    그의 절개는 후대에 이르러 인정받아 1822년(순조 22) 두문동 표절사(表節祠)에 추가로 배향되었다.충정공 김약시(金若時) 선조 또한 1383년 문과에 급제해 진현관 직제학을 지냈으나, 고려가 멸망하자 황주에 은거하며 끝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기록에 따라 김충한 선조와 동일 인물로 보거나 별개의 인물로 언급되기도 하는 고려 말 예의판서 김중한(金中漢) 선조 역시,    가문의 명예와 선비의 지조를 지켜낸 인물로 평가되며 후세에 두문동 72현으로 추송(追頌)되고 있다.충신들의 숭고한 넋, 한식의 기원이들의 공통점은 권력에 타협하기보다 죽음을 택한 ‘지조’에 있다. 우리 조상들은 한식날 불을 피우지 않음으로써 그들이 겪은 고통을 함께 나누고, 그들의 맑고 곧은 정신을 되새겨 왔다.따뜻한 밥 대신 찬 음식을 먹는 행위는 단순한 풍습을 넘어선다. 이는 불의에 굴복하지 않는 선비 정신에 대한 깊은 경의이자, 그 숭고한 뜻을 기리는 상징적 실천이라 할 수 있다.문화 전문가들은 “한식은 계절의 변화를 알리는 절기이자, 역사 속 충신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억하려는 민족적 의식의 산물”이라고 설명한다. 이어 “찬 음식을 먹는 풍습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다시금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정선 두문동과 ‘한(恨)’의 노래강원도 정선에도 같은 이름의 두문동이 전해진다. 정선과 태백 사이에 위치한 두문동재(싸리재) 일대는, 고려 유신들이 고개를 넘으며 수도 개경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렸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전오륜, 신안, 김충한 등 72현 가운데 일곱 명의 선비가 이곳에 들어와 거칠현동에 은거한 것으로 전해지며, 이들을 따로 ‘정선 전7현’이라 부르기도 한다.정선에 머문 이들 유신들은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하며, 망국의 슬픔과 부귀권세를 버린 자신의 처지를 산나물을 뜯어 먹으며 노래로 읊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노래는 훗날 향토민요 ‘정선아리랑’의 원형으로 이어졌으며, 그 특유의 애절하고 구성진 가락에는 고려 유신들의 ‘한’과 ‘충절’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오늘날에도 정선에는 이들이 머물렀던 ‘거칠현동(居七賢洞)’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으며, 그 넋을 기리는 제향이 이어지고 있다.현대인 얄팍한 이해타산에 경종두문동 72현은 말이 없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에게 그들의 침묵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이익과 권력을 좇아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는 정치 현실, 신념보다 효율이 우선시되는 현대 사회에서 이들의 ‘미련한 절개’는 때로 시대에 뒤떨어진 가치로 비칠지도 모른다.그러나 시대가 변해도 결코 변하지 말아야 할 기준은 존재한다. 자신의 뿌리를 부정하지 않고 끝내 불꽃 속으로 걸어 들어간 그들의 기개는,    타협이 미덕처럼 여겨지는 오늘의 시대에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불길을 견딜 준비가 되어 있는가.”개자추의 불꽃은 이미 꺼진 지 오래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두문(杜門)의 정신은 여전히 역사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로 남아 있다.진정한 선비의 길은 시대의 흐름을 따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멈춰 설 수 있는 용기에 있다. 두문동 72현은 그 사실을 온몸으로 증명해 보였다.
최종편집: 2026-06-16 00:59:27
최신뉴스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톡네이버블로그URL복사
오늘 주간 월간
제호 : 상촌신보본사 : 성남시 분당구 성남대로926번길 20, 402호 (야탑동, 우송프라자)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경기, 아54146 등록(발행)일자 : 2024년 07월 24일
발행인 : 김기학 편집인 : 김동영주필 : 박상배 편집국장 : 김기천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창환 청탁방지담당관 : 김택수 개인정보관리책임자 : 김석제
Tel : 070-8287-1300e-mail : kdy33000@naver.com
Copyright 상촌신보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