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제2대 국왕 정종의 비, 정안왕후(定安王后) 김씨. 그는 여말선초 격동의 시기에 권력의 중심에 있었으면서도 무욕(無欲)의 삶을 실천하며 왕실의 안정을 이끈 인물이다.
정안왕후(1355~1412)가 왕비가 된 시기는 조선 건국 초기, 왕자들 간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이 극에 달했던 때였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실권을 잡은 이방원이 형 방과(정종)를 왕위에 세우면서, 그녀는 44세라는 늦은 나이에 조선 역사상 최고령으로 왕비(덕비)에 책봉되었다.
남편 정종은 권력에 뜻이 없었다. 사실상 동생 이방원의 기세에 눌린 `임시 국왕`의 처지였다. 1398년, 남편 방과(정종)가 세자로 책봉되자 정안왕후는 기뻐하기보다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당시 이방원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기에, 남편이 왕위에 오르는 것은 곧 `언제든 죽을 수 있는 표적`이 됨을 직감했기 때문이었을까!‘가시방석 왕좌’, 정안왕후의 결단때문인지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방간의 난)이 일어난 후 정안왕후는 남편 정종에게 왕위를 이방원에게 양위할 것을 직접 권유했다고 전해진다.
이는 권력에 대한 미련을 버림으로써 자신과 남편의 목숨을 보존하고, 왕실의 혼란을 조기에 종식시키려는 지혜로운 판단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실록 밖의 이야기로는 정종이 즉위한 직후 정안왕후는 사석에서 남편에게 "우리는 이 자리에 오래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동생(이방원)의 공이 크니, 우리는 그저 길을 터주는 역할만 합시다"라고 날이면 날마다 권유했다고 한다.
이는 정종이 재위 기간 내내 격구와 온천행 등으로 소일하며 `권력에 뜻이 없음`을 대외적으로 알리는 데 큰 영향을 주었던 듯하다.비록 실권은 없었으나, 정안왕후와 정종의 존재는 적장자였던 이방우가 이미 세상을 떠난 상황에서,
장자 계승의 명분을 형식적으로 유지하게 함으로써 이방원이 정통성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상징적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높은 덕성(德性)과 고매한 인품정안왕후는 조선 최초의 대비가 된다. 정종이 양위한 후, 그녀는 조선 역사상 최초로 왕대비라는 존호를 받게 되었다.
왕세자빈 덕빈(德嬪)에 이어 국왕으로 양위 받아 즉위를 하자 `덕비(德妃)`로 봉해졌고, 1400년(정종 2년), 정종이 동생인 방원에게 양위하자
`순덕왕대비(順德王大妃)`의 존호를 받았다. 그의 삶 전체가 덕으로 이루어질 만큼 덕성(德性)이 높았다.태종은 정안왕후를 `순덕왕대비`로 모시며, 명절이나 탄신일마다 풍성한 잔치를 열고 직접 문안 인사를 드리며 진심 어린 공경을 다 했다.
형수이기 때문만 아니라, 그녀가 태종의 권력 장악 과정에서 단 한 번도 반기를 들거나 정치적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태종 이방원은 왕권 강화에 방해가 되는 인물이라면 처남(민무구 형제)이나 사돈(심온)까지도 가차 없이 숙청한 냉혹한 인물이다.
그러나 정안왕후에게만은 평생 극진한 예우를 다했다. 정안왕후는 태종의 아내인 원경왕후 민씨가 권력 투쟁으로 태종과 갈등을 빚을 때도,
오히려 원경왕후를 다독이며 중재하는 역할을 맡아 왕실의 어른으로서 균형을 잡았다.‘조선사랑꾼’의 원조 부부애정안왕후는 정종과의 사이에서 자녀를 두지 못했지만, 정종은 불임이자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녀를 지극히 사랑했다.
지고지순한 부부애가 요즘 말로 ‘조선사랑꾼’의 원조 격쯤 되었나 보다. 당시 왕실에서 후사가 없다는 것은 큰 약점이었으나,
그녀는 이를 오히려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는 무기로 삼았다. 정종은 많은 후궁 사이에서 무려 15남 8녀를 두었다.
정안왕후는 서자들을 차별하지 않고 자애롭게 후궁의 자식들을 모두 품었다. 이로 인해 후궁들과의 마찰도 거의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그녀의 이러한 포용력은 `정종의 가계`가 태종 시대에도 숙청되지 않고 왕족으로서의 예우를 온전히 누릴 수 있게 한 방어막이 되었다.온화하고 부드러운 성품으로 덕행을 쌓아 아랫사람을 다스렸던 정안왕후는 친족들과도 두터운 친교를 유지했다.
그녀의 겸손한 태도는 서슬 퍼런 태종 집권기에도 정종의 가계가 화를 입지 않고 천수를 누리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함으로서 왕실의 완충지대 역할을 했다.정안왕후가 1412년(태종 12년) 58세를 일기 먼저 세상을 떠나자 태종이 정종을 위로하기 위해 잔치를 열었으나,
정종은 아내 생각에 눈물을 흘리며 잔치를 파하고 돌아갔다는 애틋한 일화도 전해진다.`내려놓음`을 실천한 숨은 현자(賢者)그녀가 죽자 태종도 3일 동안 조회를 폐하며 슬퍼했고, 남편 정종은 그녀의 죽음 이후 더욱 정사를 멀리하며 그녀를 그리워하다 7년 뒤 세상을 떠났다.
현재 두 사람은 개성에 위치한 후릉(厚陵)에 나란히 잠들어 있다. 정안왕후는 비록 존재감이 약한 왕비로 기억되곤 하지만,
가장 위험한 시기에 가장 현명한 `내려놓음`을 실천하여 자신과 가족을 지켜낸 조선 초기의 숨은 현자(賢者)였다.역사가들은 정안왕후를 `조선 왕실 역사상 가장 처신이 완벽했던 왕비` 중 한 명으로 꼽는다.
"그녀의 침묵은 무능함이 아니라, 태풍의 눈 속에서 가문을 지켜낸 가장 강력한 정치적 전략이었다."라고... 김동영, 박상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