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검을 빼어 들고 다시 앉아 헤아리니 흉중에 먹은 뜻이 한단보(邯鄲步) 되었구나 두어라, 이 또한 한 명(命)이니 일러 무엇하리오.”― 김천택, 『청구영언』 중에서‘한단보(邯鄲步)’는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고사에서 비롯된 말이다. 연나라의 한 젊은이가 조나라 수도 한단 사람들의 우아한 걸음걸이를 배우려다    제대로 익히지도 못하고, 결국 자신의 원래 걸음걸이마저 잊어버려 엉금엉금 기어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다.자기 본분을 잊고 남을 무턱대고 흉내 내면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김천택은 이 고사를 통해 양반을 흉내 내다 정체성을 잃고 방황하는 중인의 처지를 자조적으로 노래했다.    시쳇말로 말하자면, ‘헛된 겉치레를 버리고 자신의 길을 가라’는 일종의 자기 성찰이기도 하다.『청구영언』에 등장하는 여항육인(閭巷六人), 즉 장현·주의식·김삼현·김성기·김유기·김천택은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 가단(歌壇)을 대표한 인물들이다.    ‘여항’이란 백성들의 집이 모여 있는 거리, 곧 서민의 삶터를 뜻한다.이들이 남긴 시조에는 그 삶의 현장에서 길어 올린 해학과 풍자, 그리고 애환이 담겨 있다. 『청구영언』에는 이들 여항 문인들의 시조 65수가 실려 있는데,    신분 질서를 비꼬며 울분을 토로하는 노래도 있고, 양반 문인의 풍류를 닮아 자연을 찬미하는 노래도 있다.    김천택의 시조 한 편은 바로 그러한 시대적 처지를 상징적으로 대변한다. 남파(南坡) 김천택(金天澤)은 경주김씨 출신으로, 대략 1680년대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숙종 대에 포도청 포교를 지냈다고 전해진다. 범죄자를 잡아들이는 직무를 맡았던 인물이라 다소 엄혹한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그에게는 또 다른 면모가 있었다. 바로 노래로 이름을 떨친 당대 최고의 가객(歌客)이었다는 점이다.그는 시조 창작에 능했고 음률에도 밝아 조선 가단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청구영언』의 편찬 역시 단순한 문학적 작업을 넘어,    중인 가객으로서의 자기 성찰과 계층적 자각에서 비롯된 문화적 행보였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여항육인의 작품에 발문을 붙여 중인 가객들의 존재와 가치를 당당히 드러냈다.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의문이 남는다. 왜 김수장(金壽長)은 여항육인에 포함되지 않았을까.노가재(老歌齋) 김수장은 김천택과 함께 활동한 당대 최고의 가객으로, 두 사람은 경정산가단에서 나란히 활동하며 새로운 노래 문화를 이끌었다.    같은 경주김씨 가문 출신으로, 조선 시조 문학을 대표하는 쌍벽으로 평가되는 인물이다.김수장은 훗날 시조 883수를 모아 『해동가요』를 편찬했고, 『가곡원류』의 성립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시조집 『해동가요(주씨본)』 역시 중요한 문헌으로 전해진다. 오늘날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는 『청구영언』,    『가곡원류』, 『해동가요』는 흔히 조선시대 3대 시조집으로 불리며 한국 시가문학의 중요한 유산으로 평가된다.이와 관련해 국립한글박물관이 2017년에 간행한 김천택 편 『청구영언』 영인본에는 매우 흥미로운 흔적이 발견된다.한자로 쓰인 ‘閭巷六人’이라는 소제목을 자세히 살펴보면, 원래의 ‘七’자를 긁어내고 ‘六’자로 고쳐 쓴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는 처음에는 ‘여항칠인(閭巷七人)’으로 계획되었다가 후에 수정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만약 그렇다면, 그 일곱 번째 인물은 바로 김수장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왜 그의 이름은 지워졌을까.노래에 대한 견해 차이 때문이었을까. 김수장은 18세기 중반 시조 883수를 모아 『해동가요』를 편찬하며 가곡 전통을 정리했고,    김천택은 우리말 노래를 ‘영언(永言)’이라 부르며 또 다른 음악적·문학적 지향을 드러냈다.같은 경주김씨 문중 출신의 가객이었지만, 노래를 바라보는 철학과 방향은 서로 달랐던 것인지도 모른다.
최종편집: 2026-04-20 20: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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