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보유한 대한민국 족보는 신라 왕족이 사용했던 일부 성씨를 제외하면 대부분 고려 초기부터 시작된다.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이 각 지역 호족에게 성을 하사했기 때문이다. 태조 왕건이 고려를 세우기 이전에는 왕족 박(朴), 석(昔), 김(金) 세 가지 이외에는 성을 사용하지 못했다. 삼국시대의 역사를 다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기원전 69년 신라를 세운 혁거세 박처럼 생긴 둥근 알에서 태어났기에 박씨 성을 갖게 되었다고 말하고,
유리왕이 초기 신라를 이루던 6개 촌의 촌장들에게 각각 이(李), 정(鄭), 최(崔), 손(孫), 배(裵), 설(薛)이라는 성을 내려주었다고 나와 있다.
고구려를 세운 동명성왕의 성은 고(高)씨고 이름이 주몽이라는 이야기와 백제 왕족의 성씨가 부여(扶餘)라는 이야기도 등장한다.
이 외에도 고려 건국 초기史에서 보면 경주를 대도독부로 격상시킨 뒤 6부의 촌장들이 성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으나, 주로 박·석·김이 왕족 성씨로 알려져 있다. 성이 어머니의 핏줄을 뜻하는 것실제 성씨(姓氏)가 처음 만들어진 곳은 중국으로 추정된다. 중국에서 처음 성(姓)을 쓴 사람은 신농씨로 중국 역사의 기원을 담은 신화에 등장한다.
신농씨는 ‘강(姜)’을 자신의 성으로 삼았는데, 자신의 어머니가 사는 강수(姜水)라는 곳의 지명에서 성을 따왔다.
신농씨와 더불어 중국인의 조상으로 여겨지는 ‘황제’란 인물은 그의 어머니가 희수(姬水)라는 곳에 살았기에 ‘희(姬)’라는 성을 가졌고,
성(姓)이라는 한자에 여자 여(女) 자가 들어가 있는 것도 이렇게 성이 어머니의 핏줄을 뜻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반면 씨(氏)는 남성들이 아버지의 핏줄을 나타내기 위해 자신들이 새로 정착해 살게 된 지명이나 가까운 조상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고대 중국이 농사를 짓고 정착해 살아가는 농경사회로 변하면서 남성의 역할이 점점 커지게 되자 아버지의 핏줄을 뜻하는 ‘씨’가 등장한 것이다.
이후 성은 주로 혈통을, 씨는 출신 지역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다 점차 성과 씨를 구분하지 않고 ‘성씨’로 합쳐 쓰기 시작하게 된다.고려로 넘어와 태조 왕건은 왕족이 아닌 각 지역 호족도 성과 본관(本貫)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이 정책을 ‘토성분정(土姓分定)’이라고 한다.
‘토(土)’는 지역·지연의 뜻을 가진 본관을 지칭하고 ‘성(姓)’은 혈연의 뜻을 가진 성씨를 각각 뜻한다. 결국 왕건은 본관과 성씨를 합쳐 토성을 호족들에게 수여한 셈이다.
예를 들어 청주(淸州) 한(韓)씨라고 했을 때, 한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청주 지역에서는 상당한 권력과 특권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의미다.
일종의 정부로부터의 공인인증을 받는 격이기 때문이다. 이래서 본관이 중요한 이유다.고려, 호족에게 본관과 성을 하사태조 왕건은 전국 각 지역 유력한 호족에게 본관과 성을 하사함으로써 각 지역 지배권을 인정해 줬다.
안동 권 씨는 안동에서 힘 있는 호족이라는 인증을 받은 셈이고, 전주 이 씨는 전주에서 힘 있는 호족이라고 왕건이 인정했다는 뜻이다.
이는 반드시 자신에게 도움을 준 사람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반대편에서 싸웠지만 해당 지역에서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던 호족에게도 성을 하사했다.
다만 이런 반대편 호족에게는 ‘우’ 씨 ‘마’ 씨처럼 소와 말과 같은 동물을 연상시키는 성을 하사했다.태조 왕건의 이 같은 방책은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지방 호족들을 포섭하고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일환이다. 임금이 공신에게 성과 본관을 내려 주는 사성정책(賜姓政策)을 시행한 것이다.
이를 통해 호족들은 성과 지역 기반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으며 고려 왕실의 일원으로 통합되었고, 성씨 체계가 정착되는 계기가 되었다.
“태조 18년(935) (신라) 경순왕 김부(金傅)가 와서 항복하자, 나라를 없애고 그곳을 경주(慶州)라 하였다.
(태조) 23년 경주의 관격(官格)을 대도독부로 삼았다. 또한 경주 6부의 이름을 고쳤다.”(『고려사』 권57 지리2 경주조)김부에게 ‘계림(鷄林)’을 ‘경주(慶州)’로 개칭, 본관 하사천년왕국의 막을 내리며 경순왕 김부에게 ‘계림(鷄林)’이라 불리던 도시를 ‘경사로운 고을’이란 뜻의 ‘경주(慶州)’로 지명까지 개칭해 본관을 하사했다.
이 역시 지방 호족의 일부로 국한해 부여한 것으로 토성분정의 정책이 아닐 수 없다. 940년(태조23)에는 경주를 대도독부로 격상시킨 뒤 6부의 명칭을 고치고 각각 토성을 분정했다. 중흥부(*李)ㆍ남산부(*鄭)ㆍ통선부(*崔)ㆍ임천부(*薛)ㆍ가덕부(*裵)ㆍ장복부(*孫)가 그것이다.경주의 예와 같이 940년 군현 명칭 개정은 해당 지역 유력층의 비중과 전략적 중요성, 교통·생산의 중요성 등을 고려해 경·목·도호(도독)부·군·현·향·부곡과 같이 군현의 격(본관)을 정했다.
따라서 본관이 어느 지역인가에 따라 그 사람의 사회적 위상이 결정됐다. 왕건이 발해 세자 대광현에게 고려 왕족의 성인 왕씨를 준 것은 그만큼 대광현의 위상을 높여주기 위해서였다.태조 왕건이 본관과 성을 정해준 덕분에 고려 유력 호족은 모두 성을 갖게 되었다. 다르게 해석하면 성을 갖지 못한 사람은 신분이 높은 호족이 아니라는 뜻이다.
성을 갖지 못했다는 사실 하나로 평민이나 천민으로 전락한다는 의미기도 하다.본관과 성을 갖지 못한 호족, 인정받지 못했을 것 태조 왕건 즉위 전에는 지방에서 권세를 떨치던 호족들은 본관과 성이 없더라도 아무 불편 없이 지냈을 것이다.
하지만 일단 왕건에 의해 유력한 모든 호족이 본관과 성을 갖게 되자 혹시라도 본관과 성을 갖지 못한 호족이 있었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했을 것이다. 인증받지 못한 호족은 주변 사람들에게 호족 대접을 받지 못했을 것이니 그 이유만으로도 점점 힘을 잃어간 것은 당연지사다.
이전에는 생각조차 못했던 본관과 성이 이제는 신분을 나타낼 뿐 아니라 현실에서의 권력을 좌지우지하는 힘을 갖게 된 거나 다름없다.그렇게 고려 태조 왕건이 아무런 비용도 지불하지 않고 마치 두부모 잘라 주듯 선심으로 민심을 규합한 셈이다.
하사한 토성 즉 본관과 성은 이제 지방 호족에게는 자신의 특권을 유지하는 아주 중요한 증표가 됐다.
당연히 함부로 버릴 수 없고 보물처럼 소중히 간직할 필요가 있었다. 얼마나 귀중했으면 모든 가문이 족보(族譜)라는 신기한 책을 만들기 시작해 한 세대가 지날 때마다 업데이트해 왔을까.
손이 많이 가는 족보를 만들어서라도 자신의 본관과 성을 지키는 것이 이득이었기 때문이다.물적토대 없이도 본관과 성으로 충성심 이끌어 그러나 본관과 성이 생기면서 가장 큰 혜택을 본 사람은 태조 왕건이었다. 본관과 성을 가지고 호족 행세를 하는 유력자 입장에서 보면 본관과 성이
모두 태조 왕건에게서 나온 만큼 태조 왕건이 세운 고려라는 나라의 위신이 흔들리면 자신의 본관과 성도 다 흔들린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호족이라는 명성과 특권을 잃게 될 것이므로 자신의 정당성을 인증해준 태조 왕건과
그 후손들 지위를 잘 보존시키는 것이 호족 본인의 이해관계에도 아주 중요해졌을 법도 하다. 태조 왕건으로서는 호족에게 땅을 준 것도 아니고 돈을 준 것도 아니고 이름뿐인 본관과 성을 하사한 것뿐이지만 그것으로 엄청난 충성심을 이끌어냈다.
갑자기 본관과 성을 가지는 것이 중요해진 이유는 다른 유력한 호족들이 본관과 성을 가졌기 때문이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데 바로 이것이 네트워크 효과다.현대에 와서도 낯선 장소나 혹은 초면인 사회적 관계사에서도 간혹 본관과 성씨를 묻거나 확인하려는 관습이 있다.
그 당시라면 “내가 우리 지역에서는 상당한 힘이 있는 호족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하더라도 주변 사람들은
“본관과 성도 없는 사람이 무슨 힘이 있겠느냐?” 무시하지 않았을까도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