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했던 신라 천년의 문을 닫아야 했던 비운의 군주, 경순대왕(敬順大王) 김부.    그가 천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한국인의 가슴속에 가장 깊이 자리 잡은 민속신앙의 ‘으뜸 인물’인 것으로 나타났다. 전국에 산재한 전통 신앙의 신격(神格) 인물들을 전수 조사한 결과, 경순왕 다음으로 공민왕(恭愍王)—최영(崔瑩)장군—남이(南怡)장군—김시습(金時習)—송씨부인(宋氏夫人)—임경업(林慶業) 장군 등이 민속신앙의 중심인물 순으로 등장한다. 최근 극장가에서는 단종애사(哀史)를 주제로 한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천만 관객몰이를 하며 계유정란(세조의 왕위 찬탈)과 얽힌 사극이 재조명 받고 있는 시점이라서 이같은 조사결과에 더욱 이목이 쏠린다.    단종과 주변 인물들의 기구한 운명, 특히 15세의 어린 나이에 왕비가 되었다가 1년 5개월 만에 폐위된 후 60평생을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 속에서 산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 宋氏, 1440~1521)의 한많은 여생은 애틋함을 더한다.역사는 승자의 기록이지만, 민속은 패자의 눈물을 기억한다. `망국의 마지막 군주` 경순왕. 전쟁에서 패하여 나라를 빼앗긴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더 이상 고통받지 않도록 스스로 왕위를 포기(귀순)하는 결단을 내렸던 임금이다. 전문가들은 “경순왕을 비롯한 비운의 인물들이 민속신앙의 정점에 서 있다는 것은, 우리 민족이 단순히 강한 자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아픔을 겪은 이의 한(恨)을 풀어줌으로써 공동체의 안녕을 기원해 왔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평했다.사학계에서는 이 같은 왕위 선양을 ‘서로 사랑하라’는 묵자의 겸애(兼愛)사상을 기반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사람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라는 21세기 인류 구원의 메시지 성격과 같다. 그럼에도 고려 조정은 민심이 동요할 것을 우려해, 죽어서도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신라 왕들 중 유일하게 경주가 아닌 경기도 연천에 묻힌 임금이 경순왕이다.    경순왕의 이같은 처지는 그래서 더욱 한국인 특유의 `망향`의 정서와 맞닿아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경순왕에 이어 고려말 공민왕은 자신이 총애하던 총신(寵臣)에게 살해당한 한많은 임금이며, 최영장군은 고려사직을 지키려다가 살해당한 장군이다.    모함으로 약관에 형살(刑殺) 당한 남이장군, 세조(世祖)쿠데타로 한많은 여생을 산 단종비(妃) 송씨(宋氏)부인,    그리고 세조(世祖)에 저항, 평생을 광인행세를 하며 방랑한 김시습(金時習) 등으로 이들 모두 민중의 공감을 집결시킨 원신(怨神)들이라는게 공통점이다.민속신앙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처럼 ‘비극적 최후’를 맞은 인물들이다.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거나(최영, 남이), 나라를 잃거나(경순왕), 평생을 은둔하며 살아야 했던(김시습) 이들이다.우리 전통신앙의 토속신(土俗神)들이 이처럼 한국인의 원한 공감(共感)에서 탄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우리의 민속신앙은 신앙의 진리를 터득하고 입신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인간적인 원한(怨恨)에 공감한 것이 한국적 특성이다.    이처럼 우리의 민족적 속성은 역사적 인물 가운데 억울하게 죽거나 유폐된 사람의 은원(恩怨)에 민감하게 공감한다. 경순왕은 민간에서 `김부대왕`이라는 신령으로 모셔지기도 한다.    불교문화의 전통적 색채가 강한 신라의 국혼과 수련을 통해 늙지 않고 영원히 사는 신선(神仙)이 되는 불로장생의 도가사상이 결합돼 영향을 미친 민간신앙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경순왕의 유흔(遺痕)은 원주시 남면 용화산 학수암에 경순왕 원당(願堂)이 있고, 백운산 황산사와 태고사에도 영당(影堂)이 있었다.    또한 순천 송광사, 문경 양산사, 경주 황남전에도 불교와 습합하여 영정이 모셔져 있다.    이뿐만 아니라, 경주 불곡사에는 경순왕이 신었던 것으로 구전되는 당혜(唐鞋·꽃신이라고도 불리는 가죽신의 일종) 한 켤레가 신앙의 대상이 돼 있다.경순왕(敬順王)의 이름인 ‘금부대왕(金傅大王)’으로도 신앙되고 있는 이 신당들은 왕의 피난지로 알려진 충주-제천-원주지방에 많이 분포돼 있었다고 조선조 중엽의 문헌에도 적혀있다.    법천사(원주)는 경순왕이 은거하거나 머물렀던 곳으로 주로 고려로 향하는 길목인 충청과 강원, 경기지역 일원에 사당과 유적, 그리고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유독 많다. 강원도 인제군 상남면 김부리에는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기 전이나 후에 잠시 머물렀다는 설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이곳에는 경순왕을 모시는 `대왕각`이 있으며, 마을 이름인 김부리(金富里) 자체가 경순왕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이는 나라를 잃고 떠돌았던 그의 넋을 위로하고자 했던 민초들의 마음이 투영된 결과로 여겨진다.    역사적 패배자일 수 있는 인물을 민중들이 신격화하여 기억한다는 점은 그만큼 경순왕에 대한 애잔함이 컸음을 보여준다.
최종편집: 2026-04-20 20: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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