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기념물 제98호로 지정된 상촌공(桑村公) 묘역 아래에는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져 있으며, 그 곁에는 문자의 판독이 어려운 와비(臥碑)가 남아 있다.
이것은 본래 공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우려 했던 신도비였으나, 생전에 "자신을 위한 비를 세우지 말라."는 유지를 받들어 비를 세우지 않고 땅에 묻어 두었기 때문이었다고 전한다.
‘신도비(神道碑)’란 임금이나 정2품 이상 고위 관료의 묘역 남동쪽 큰길가에 세우는 석비를 말한다.
여기서 ‘신(神)’은 본래 번개가 번쩍이는 모습을 본뜬 ‘신(申)’에서 비롯된 글자였다. 이후 제사와 관련된 뜻을 더하기 위해 ‘보일 시(示)’가 결합되었다.
갑골문의 복사(卜辭)에서도 이 글자는 본래의 의미보다 간지(干支)나 지명 등으로 폭넓게 사용되었으며, 본래 뜻을 보존하기 위해 새로 만들어진 글자가 ‘전(電)’이다.
‘도(道)’는 길을 뜻하는 ‘착(辵)’과 효수된 사람의 머리를 상형한 ‘수(首)’가 결합된 글자로, 본래는 국법의 준엄함을 상징하였다.
이후 의미가 확장되어 ‘길’이나 ‘거리’를 뜻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이치를 따라 말하다’라는 의미로까지 발전하였다.‘비(碑)’는 뜻을 나타내는 ‘돌 석(石)’과 소리를 나타내는 ‘비천할 비(卑)’가 결합된 글자이다. ‘석(石)’은 손에 쥘 수 있는 크기의 날이 있는 돌을 본뜬 상형문자이며,
‘비(卑)’의 윗부분은 의식에 쓰이던 의장(儀仗), 아랫부분은 오른손을 본뜬 ‘또 우(又)’에서 변형된 것이다.
의식에서 의장을 들고 도열하던 이들이 낮은 신분이었던 데서 ‘낮다’, ‘천하다’라는 뜻이 파생되었다.비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처음에는 ‘각석(刻石)’이라 불렸고, ‘비석(碑石)’이라는 명칭은 전한 말에서 후한 초기에 이르러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비의 형태는 일반적으로 대좌(臺座), 비신(碑身), 개석(蓋石)으로 구성된다. 대좌는 비신을 받치는 받침대로 네모난 형태와 거북 모양이 대표적이며,
특히 거북 모양의 대좌를 귀부(龜趺)라 한다. 비신은 직육면체로, 앞면을 비양(碑陽), 뒷면을 비음(碑陰)이라 부른다.
비의 상단부나 개석에는 제목을 새긴 제액(題額)을 두는데, 대개 전서(篆書)로 쓰여 전액(篆額)이라 한다. 개석에는 뿔 없는 용의 형상을 새기는 경우가 많아 이를 이수(螭首)라 부른다.신도비는 본래 중국 한나라에서 종2품 이상의 관료에게만 허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동문선(東文選)』 등의 기록으로 보아 고려 시대부터 세워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초기에는 왕릉에도 신도비를 건립했으나, 문종 때 법으로 이를 금하였다.
이후 정2품 이상 관원에게만 허용되면서 신도비는 가문의 위상과 직결되는 상징물이 되었다. 공신이나 석학의 경우에는 왕이 직접 건립을 명하기도 하였다.과거에는 ‘비’와 ‘갈(碣)’이 혼용되었으나, 후대로 오면서 벼슬의 등급에 따라 명칭과 형태가 구분되었다.
비는 장방형의 비신 위에 지붕 모양의 개석을 얹는 반면, 갈은 덮개 없이 비신 상단을 둥글게 처리하며 규모도 비교적 작다. 일반적으로 3품 이하 관원의 묘에는 묘갈을 세웠다.묘를 식별하기 위한 장치는 비나 갈에 그치지 않는다. 천재지변이나 오랜 세월로 인한 훼손에 대비해 묘지(墓誌)나 지석(誌石)을 함께 설치하기도 했다.
이는 금속판이나 돌, 도판(陶板)에 고인의 본관과 성명, 생년월일, 행적, 묘의 위치 등을 새겨 무덤 앞이나 주변에 묻어 두는 것으로, 후대에 이르기까지 정확한 기록을 전하기 위한 장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