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두문동(杜門洞), 그 닫힌 문은 충절의 문이었다 상촌 김자수와 고려 충신 72현(七十二賢)의 절개를 기리며   조선의 역사가 열릴 때, 고려의 문은 닫혔다. 그러나 그 닫힌 문 안에는 결코 꺼지지 않는 충절의 등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경기도 개풍군 광덕산 서쪽 기슭, 사람들은 그곳을 두문동(杜門洞)이라 불렀고, 그 이름은 곧 충신의 고장으로 남게 되었다.   고려 말, 권문세족의 부패와 외세에의 굴종으로 국운이 기울자, 이를 바로잡기 위한 새로운 사대부 세력, 즉 신흥사대부가 나타났다.    이들은 혁명을 통해 새 나라를 세우고자 한 이성계와 정도전 같은 무장·개혁 세력과, 기존 질서 안에서 개혁을 지향하던 정몽주, 김자수, 이색 등의 문신세력으로 나뉘었다. 그러나 역사는 결국 무력과 권력의 손을 들어주었다.조선이 건국되고, 고려 왕조가 공식적으로 폐위되자 많은 충신들이 생명의 길보다 명분의 길을 택했다. 그 대표가 정몽주이며, 상촌 김자수 또한 그러한 충절의 전형이었다.    김자수는 고려 왕조에 대한 충정을 절명시로 남기고, 마침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유명을 달리하였다. 그의 죽음은 개인의 비극을 넘어 충절의 상징으로 남게 되었다.이러한 절의를 실천한 인물들은 김자수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새 왕조 조선이 아무리 벼슬을 주려 해도 고개를 들지 않은 이들, 그들이 모인 곳이 바로 두문동이었다. 정권의 초청도, 권세의 유혹도 그들의 뜻을 꺾지 못했다.    이들은 마을의 동·서쪽에 문을 세워 굳게 닫고 세상과 인연을 끊은 채 스스로를 봉쇄했다. 이로부터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고사성어가 비롯되었다.이른바 ‘두문동 72현(七十二賢)’이라 불리는 이들은 김자수를 비롯해 조의생, 임선미, 성사제, 박문수, 김충한, 이의 등으로, 왕조가 무너진 뒤에도 그들의 정신은 꺾이지 않았다.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기 위해 벼슬을 버리고 삶을 단절한 그들은, 새로운 조선조의 유학자들에게 오히려 더욱 깊은 사표(師表)로 추앙받게 된다.조선 정조는 이들의 충절을 기려 1783년, 성균관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우고 72현의 충절을 예식으로 예우하였다. 이는 단지 사적 추모에 그치지 않고, 조선이 지향한 유교정치의 가치가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를 선언한 역사적 사건이었다.두문동은 단순한 은둔의 땅이 아니다. 그것은 한 시대를 살아간 선비들이 명분을 위해 삶을 접은 곳이며, 유교 정신의 정수(精髓)가 실천된 곳이다.    그들이 선택한 침묵은 결코 소극적 포기나 회피가 아니었다. 그것은 외려 가장 적극적인 방식으로 역사의 부름에 응답한 고결한 결단이었다.오늘날 우리는 현실과 타협을 미덕이라 여기고, 이익과 실리를 앞세우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일수록 더욱 두문동의 정신을 되새겨야 한다.    국가의 명운 앞에서, 개인의 이익보다 대의를 앞세운 이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유교적 전통과 정의의 가치도 존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상촌 김자수를 비롯한 두문동 72현의 삶은 단지 과거에 머무는 충절이 아니다. 그들의 고요한 결기는 오늘 우리 사회가 다시 마주해야 할 정신적 거울이며, 흔들리는 시대정신 속에서 지조와 의리를 되묻는 살아 있는 질문이다.그들이 닫은 문은 곧 마음의 문이었고, 진실의 문이었으며, 역사의 문이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다시 그 문을 두드릴 용기가 필요하다.  
최종편집: 2026-04-21 01:3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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