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Ⅱ】경순왕과 상촌공의 충절 — 두 시대의 공명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맥, 인의와 절의로 천년을 잇다”
천년의 시간, 하나의 맥으로 흐르다
신라 말기, 국력은 이미 바닥에 이르렀다. 지방 호족들은 독자 세력을 구축하며 중앙의 통제가 무너졌고, 전란과 약탈은 백성의 삶을 깊은 피폐로 몰아넣었다.
“왕조의 마지막 임금으로서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 ”이러한 상황에서 경순왕은 스스로에게 숙명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을 선택하면 끝없는 피바람이 불 것이며, 백성들의 삶은 더욱 파괴될 것이 분명했다. 경순왕은 왕조의 영광보다는 백성의 생명을 앞에 놓고 고뇌했다.
결국 그는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을 결심한다. 이는 단순한 정치적 선택이 아니라, 혼란의 시대 속에서 마지막까지 백성의 생명을 우선한 ‘인의의 실천’이었다.
항복 이후 경순왕은 자신의 신분을 지켰으나, 고려 조정에서 높은 지위를 받았다. 이는 그의 결단이 당시에도 ‘대의를 위한 선택’으로 인정받았음을 보여준다.
그는 신라 마지막 군주로서의 체면보다 새로운 통합 국가를 위한 화해와 협력의 상징이 되었다.
경순왕의 인의(仁義), 상촌공의 절의(節義)로 다시 태어나다
수백 년 후 고려 말, 세상은 다시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몽골 침입 이후 국력은 회복되지 못했고, 새 왕조를 둘러싼 정치 세력의 갈등과 도덕적 혼란이 가중되었다.
이 격동의 시대에 상촌 김자수 선생은 고려의 신하로서 절의를 굳건히 지켰다. 조선 개국 이후 수많은 학자와 관료들이 시대의 흐름을 따라 벼슬에 나아갔지만, 상촌공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선비의 본분을 끝내 지키며 두문동에 은거했다. 그의 결단은 개인의 명예를 위한 고집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이어진 신라 왕손 가문으로서, 고려라는 나라에 대한 의리와 조상의 가르침을 실천한 삶의 선택이었다. 상촌공의 시문에는 이러한 신념이 오롯이 담겨 있다.
「병중자성(病中自省)」은 병중에도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며 충신의 자세를 잃지 않은 진솔한 고백이며, 「증제자시(證弟子詩)」는 제자들에게 절의를 잃지 말라는 학문의 길을 남긴 가르침이다.
이는 상촌공이 단지 문학적 재능을 지닌 선비가 아니라 ‘도리와 명분을 생애의 기준으로 삼은 충신’이었음을 웅변한다. 충절의 계보, 왕손의 정신으로 빛났다
두 시대 인물이 던지는 질문 — 오늘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경순왕은 백성을 위해 왕위를 내려놓았고, 상촌공은 절의를 위해 벼슬을 버렸다. 하나는 군왕의 자리를 포기했으며, 다른 하나는 신하로서의 관직을 거부했다.
서로의 선택은 다르지만, 두 인물은 모두 ‘도리’라는 하나의 중심’을 지키기 위해 생애를 걸었다. 오늘의 우리는 이 두 인물이 남긴 질문 앞에 다시 선다.
권력과 이해관계가 얽힌 자리에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시대의 혼탁 앞에서 양심과 원칙은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가문의 이름과 역사를 이어받은 우리는 어떤 태도로 후대에 길을 남겨야 하는가? 혼란한 시대일수록 역사의 정신은 더 선명하게 우리를 비춘다.
경순왕과 상촌공의 생애는 그 자체로 ‘윤리적 나침반’이며, 종중 구성원 모두가 되새길 역사적 자산이다.
천년의 충절, 오늘의 공동체를 세우다
경순왕의 인의와 상촌공의 절의는 천년이라는 시간을 넘어 오늘 우리 공동체의 정체성을 세우는 밑거름이 되고 있다.
종중이 이어가는 숭조(崇祖)의 전통, 지속적인 학술 활동과 문중 화합의 노력은 모두 이 정신의 계보를 이어가는 실천이다.
당대의 시대정신은 늘 변화하지만, 도리·의리·명분이라는 가치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경주김씨 상촌공파가 지켜온 정신은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우리가 다음 세대에 물려줄 가장 중요한 유산이다. 천년의 충절은 피가 아닌 정신으로 이어진다. 왕의 인의와 선비의 절의가 만나는 그 자리 —
바로 그곳이 오늘 우리가 지켜야 할 공동체의 품격이며, 역사적 양심의 터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