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Ⅰ】경순왕의 결단 — 천년왕국의 문을 닫다   【편집자 주】본지는 이번 제4호를 맞아, 「제1회 경순왕의 결단 — 천년왕국의 문을 닫다」, 「제2회 경순왕과 상촌공의 충절 — 두 시대의 공명」, 「제3회 경순왕의 유산 — 화합과 통합의 리더십」 등 세 편의 연재 기획을 통해, 신라의 마지막 군주가 남긴 역사적 결단과 그 정신이 지닌 현대적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고자 한다.   “나라를 버린 것이 아니라 백성을 살렸다”후삼국의 격랑 속에 즉위한 마지막 임금927년, 경순왕 김부(金傅)는 이미 쇠퇴한 신라 왕조의 마지막 불씨를 이어받았다. 왕위에 올랐을 때 국력은 이미 고갈되고, 지방 호족들은 각기 세력을 일으켜 나라의 통제는 무너지고 있었다.    경애왕이 견훤의 침입으로 피살된 뒤, 경순왕은 혼란의 책임을 짊어진 채 즉위했으나, 그가 마주한 현실은 더 이상 왕의 뜻으로 수습할 수 없는 격변의 시대였다.신라 천년의 왕권은 빛을 잃고, 농민과 백성은 전쟁과 수탈로 피폐해졌다. 경순왕은 더 이상 왕좌의 안위를 구할 수 없음을 깨닫고, 오직 ‘백성의 생명’을 지키는 길만이 남았음을 통감했다.고려 태조와의 만남 — 항복이 아닌 통합의 길경순왕은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개경으로 향했다. 고려 태조 왕건을 알현한 자리에서 그는 나라의 명운을 걸고 결단을 내렸다. 그것은 항복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로의 ‘통합’이었다.태조는 경순왕의 진심을 이해하고 예우를 다해 맞이했다. 그에게 왕족의 예를 갖추어 대우하고, 사위로 맞으며 경주 일대를 식읍으로 하사하였다. 이는 피를 흘리지 않고 왕조를 잇는 역사적 전환이었다.역사는 이 장면을 단순한 항복으로 보지 않는다. 이는 천년 왕국이 스스로 문을 닫되, 백성의 삶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선택이었다. 경순왕의 결단은 패망의 비극이 아니라, ‘인의(仁義)의 정치’로 해석되어야 한다.치욕 아닌 인의의 선택 — 백성을 위한 철학그의 결단은 군주의 도리를 넘어, 한 인간의 철학적 선택이었다. 무너진 제국의 마지막 임금으로서 그는 왕권보다 백성을, 명예보다 생명을 택했다. 경순왕의 마음에는 “나라를 잃더라도 백성을 잃을 수 없다”는 인의의 도리가 있었다.그 후 그는 경주로 돌아가 백성과 함께하며 여생을 보냈다. 권세를 탐하지 않았고, 고려 조정에 나아가지도 않았다. 역사는 그를 ‘항복한 임금’이 아니라 ‘백성을 살린 임금’으로 평가한다.경순왕릉과 천년의 제향오늘날 경순왕릉은 경주시 서악동의 서악서원 인근에 자리한다. 왕릉 주변에는 그의 절의를 기리는 비석과 제단이 서 있으며, 매년 가을이면 ‘경순대왕 추향대제(追享大祭)’가 엄숙히 봉행된다.제향에는 전국의 경주김씨 후손들이 모여 왕의 덕을 추모한다. 초헌관의 헌작이 이어지고, 유림의 예절에 따라 제례가 진행되는 그 자리는 천년 전 결단의 숨결이 되살아나는 성스러운 시간이다.천년의 덕업은 백성을 위한 선택에서 비롯된다경순왕의 항복은 패망의 상징이 아니다. 그것은 무력보다 도덕을, 권력보다 생명을 중히 여긴 결단이었다. 천년 왕국은 그렇게 막을 내렸지만, 그의 선택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인의의 유산’으로 남았다.천년의 덕업은 백성을 위한 선택에서 비롯된다. 그의 결단은 오늘의 우리에게 묻는다. “권세보다 사람을, 이익보다 정의를 택할 용기가 우리에게 있는가?”
최종편집: 2026-04-20 20:20:24
최신뉴스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톡네이버블로그URL복사
오늘 주간 월간
제호 : 상촌신보본사 : 성남시 분당구 성남대로926번길 20, 402호 (야탑동, 우송프라자)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경기, 아54146 등록(발행)일자 : 2024년 07월 24일
발행인 : 김기학 편집인 : 김동영주필 : 박상배 편집국장 : 김기천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창환 청탁방지담당관 : 김택수 개인정보관리책임자 : 김석제
Tel : 070-8287-1300e-mail : kdy33000@naver.com
Copyright 상촌신보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