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역사 연재】제5회_경순왕의 최후와 역사적 평가ㅡ왕위를 내려놓은 군주의 말년과 그가 남긴 유산경순왕은 935년 양국(讓國) 이후 고려 왕실의 사위이자 낙랑왕으로 봉해져 유화궁에서 여생을 보냈다.
태조부터 혜종·정종·광종·경종에 이르기까지 5대의 왕을 섬기며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였고, 경주 사심관으로서 옛 신라 지역의 질서를 안정시키는 역할도 맡았다.그의 처소에는 경주에서 올라온 옛 신하들과 종실이 드나들었고, 고려 조정에서도 예우가 두터웠다.
왕건 사후에도 경순왕의 위상은 흔들리지 않았으며, 왕 다음으로 높은 품계인 상보령에 올라 식읍과 녹봉을 받았다.마지막 나날978년(경종 3) 음력 4월 4일, 경순왕은 유화궁에서 82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고려 조정은 시호를 ‘경순(敬順)’이라 내리고, 장례를 국왕에 준하는 의전으로 치렀다.경순왕의 능은 특이하게도 경주가 아닌 경기도 장단에 조성되었다. 오늘날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산 18-2번지에 위치하며, 1975년 6월 25일 사적 제244호로 지정되었다.
신라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경주를 벗어난 왕릉으로, 그의 정치적·역사적 궤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역사적 평가경순왕의 귀순은 오랜 세월 동안 엇갈린 평가를 받아왔다. 한편에서는 “무력으로 맞서 싸우지 않고 사직을 내준 것은 군주의 책무를 저버린 것”이라는 비판이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무고한 백성의 희생을 막고 후삼국의 전쟁을 종식시킨 현명한 결단”이라는 긍정적 평가도 존재한다.실제로 경순왕의 선택은 고려의 통일을 앞당겼고, 신라 왕실의 혈통이 고려 왕실에 융합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제8대 현종 이후의 고려 국왕들은 모두 그의 외손으로, 이는 신라 왕실의 명맥이 새로운 왕조 속에서 존속했음을 의미한다.남겨진 교훈경순왕의 삶과 결정은 “나라와 백성을 위해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오늘날에도 던진다.
왕좌에 오른 지 8년 만에 천년 사직을 내려놓은 그는, 비록 군사적 영웅은 아니었으나 정치적 현실과 백성의 안위를 우선한 군주였다.그의 묘역은 오늘날에도 한 왕조의 종말과 또 다른 시대의 시작을 동시에 상징하는 장소로 남아 있다.
경순왕의 이름은 신라의 마지막 왕이자, 고려의 사위이며, 두 왕조를 잇는 역사적 가교로 기억되고 있다.이로써 경순왕의 일대기는, 즉위에서 고려 귀순, 그리고 최후와 평가에 이르기까지 다섯 차례 연재로 마무리된다.
그가 남긴 선택의 의미는 천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역사와 후손들의 논의 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