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역사 연재】제3회_고려 귀순과 신라의 멸망ㅡ 천년 사직을 내려놓은 마지막 결단   935년 음력 10월, 경순왕은 궁중의 정전에서 문무백관을 소집하고 군신회의를 열었다. 주제는 단 하나, “고려에 귀순할 것인가, 끝까지 자주를 지킬 것인가”였다.    나라의 장래를 결정하는 중대 논의 앞에서 신하들의 의견은 크게 갈렸다. 찬성파는 “국력이 이미 쇠잔하여 후백제와의 전쟁을 감당하기 어렵다.    고려에 의탁하면 백성을 보전하고 가문의 명맥을 잇는 길이 열릴 것”이라 주장했다. 반대파는 “천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남의 손에 넘길 수 없다.    비록 패망할지라도 끝까지 의기를 지켜야 한다”고 맞섰다. 그 자리에서 왕자가 굳은 표정으로 앞으로 나서 목소리를 높였다.   “나라의 존망은 하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충성과 의리를 다한 뒤에 망할지언정, 어찌 하루아침에 천년 사직을 가벼이 남에게 줄 수 있겠습니까?” 회의장은 숙연해졌지만, 경순왕의 마음은 이미 결정을 향해 기울고 있었다.경순왕의 결심잠시 침묵하던 경순왕은 낮게 그러나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사방이 고립되고 형세가 위태로워 더 이상 나라를 보전할 수 없다.    이미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은 형편에서 “무고한 백성들이 거리에서 피 흘리고 쓰러지는 참혹함을 차마 목도할 수 없다.”    전쟁을 끝내고 백성을 살리는 것이 임금 된 자의 도리다.” 그는 즉시 시랑 김봉휴에게 항복문을 들려 고려 태조 왕건에게 보냈다.    왕건은 태상 왕철과 대신들을 보내 경순왕을 영접하였고, 기원전 57년 박혁거세의 건국 이래 천년을 이어온 신라는 이로써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왕자의 은둔과 출가그러나 왕실 모두가 이 결정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양국(讓國)에 반대한 태자와 막내 왕자 김덕지는 부왕 앞에서 끝내 눈물을 삼키지 못하고 통곡하며 하직했다.    곧장 개골산(오늘날의 금강산)으로 들어간 두 왕자는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태자는 바위 아래 움막을 짓고 삼베옷을 입은 채 풀뿌리와 나물을 캐어 먹으며 은둔하였다.    그는 한 번도 속세로 내려오지 않은 채, 외로운 생을 마감했다. 막내 덕지는 화엄종에 귀의하여 범공(梵空)이라는 법명을 받고 승려가 되었다.    법수사와 해인사 등지를 오가며 수행에 전념하며 세속의 인연을 끊었다.신라 멸망의 의미경순왕의 고려 귀순은 무력 항복이라기보다, 더 이상의 피를 막기 위한 정치적 결단이었다. 그 선택은 왕조의 종말을 알렸지만,    동시에 후삼국의 전쟁을 종식시키고 한반도의 통일을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다.천년 동안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신라는 이렇게 막을 내렸으나, 그 유산은 고려를 거쳐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경순왕의 결단과 왕자들의 행적은, 역사 속에서 나라와 백성을 위해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를 묻는 묵직한 질문으로 남아 있다.
최종편집: 2026-04-20 22: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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