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제2편】 상촌 김자수 선생의 첫째 손자 김영년ㅡ충절의 뿌리, 영동에 내리다 역사의 변곡점에서 오직 충절만을 붙든 한 선비, 그리고 그 뜻을 이은 후손들이 새로운 삶의 뿌리를 내린 곳. 충청북도 영동군 심천면 각계리 일대에는 오늘도 조용히 세월을 지키고 있는 유적이 있다. 그곳은 바로 영동 김자수 유적(永同金自粹遺蹟)     상촌 김자수(金自粹, 1351~1413) 선생과 그 첫째 손자 김영년(金永年)의 정신과 삶이 깃든 땅이다. 상촌 김자수(金自粹)는 경상도 안동 출신으로, 이색·정몽주 문하에서 유학을 수학하고 1374년(공민왕 23) 문과 장원으로 급제한 인물이다.그는 성균관 대사성, 충청도 관찰사,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며 고려 말기의 충신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조선이 건국되자 그는 관직을 거절하고 낙향했다. 태조는 대사헌 자리를 내렸고, 태종은 형조판서를 다시 제수했으나, 그는 끝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양으로 가던 길,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신현리 추령(秋嶺)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죽음은 단순한 충신의 순절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기 시대에 대한 마지막 예(禮)였고, 역사를 향한 침묵의 고발이었다.손자 김영년, 영동에서 유풍을 잇다김자수가 자결한 후, 가문은 불안정한 상황에 놓였다. 그 손자 김영년(金永年)은 이 시기 외가가 있던 충청북도 영동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관직에서 물러난 그는 이곳에 정착하여, 조용히 후학을 양성하며 선조의 뜻을 계승했다.김영년은 강릉판관을 끝으로 벼슬길에서 물러난 뒤, 충북 영동군 심천면 각계리에 터를 잡고, 마을을 일구고 학문과 예절을 가르쳤다. 이곳이 훗날 경주김씨 상촌공파의 세거지가 된 것이다.그는 조정으로부터 청백리(淸白吏)로 평가받았고, 후에 후손과 지역 유림에 의해 성암서원(星巖書院)에 배향되었다.유적의 의미: 충절의 상징, 문중의 발원지    ‘영동 김자수 유적’은 단순한 거주지가 아니다. 이곳은 김자수의 절의를 계승한 후손 김영년이 삶과 학문의 터전으로 삼은 공간이며, 이후 수백 년 동안 상촌공파의 근거지가 되어 문중의 역사와 뿌리를 이룬 상징적 장소다.유적은 상촌 김자수 선생의 충절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고, 김영년 선생의 덕행과 교화의 기록이 남은 공간이다. 오늘날에도 영동 심천면 각계리 일대에는 경주 김씨의 종택, 재실, 묘역, 성암서원 등이 함께 보존되어 있으며, 매년 향사와 문중 행사가 이어지며 그 정신과 전통이 계승되고 있다.한 가문의 발원지이자, 민족 정신의 유산 김자수는 벼슬보다 절의(節義)를 택했고, 김영년은 그 정신을 학문과 교화로 잇는 길을 걸었다. 그들이 남긴 정신은 오늘날까지도 상촌공파 후손들의 삶 속에 살아 있다.영동의 이 유적은 단지 옛 선현의 흔적이 아니라, 한 가문의 뿌리요, 곧은 정신이 깃든 민족적 유산이다.“살아서는 곧고, 죽어서는 빛나리라.” 그 정신이 바로 상촌의 뿌리이고, 오늘 우리가 다시 기억해야 할 역사이다.
최종편집: 2026-04-21 01:3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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